로버트 멀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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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멀둔은 1921년 오클랜드에서 태어나 1992년 사망한 뉴질랜드의 정치인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정보 장교로 복무했으며, 이후 회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1960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재무차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했고, 1975년부터 1984년까지 뉴질랜드 총리를 지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펼쳤으며, 1981년 스프링복스 뉴질랜드 투어에 대한 논란을 겪었다. 1984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은퇴했으며, 1983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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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멀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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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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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존경하는 |
이름 | 로버트 데이비드 멀둔 |
출생일 | 1921년 9월 25일 |
출생지 | 뉴질랜드 오클랜드 |
사망일 | 1992년 8월 5일 |
사망지 | 뉴질랜드 오클랜드 |
안장 장소 | 미도뱅크 퓨레와 공동묘지 |
정당 | 뉴질랜드 국민당 |
배우자 | 시아 플라이거(1951년 결혼) |
자녀 | 3명 |
부모 | 제임스 헨리 멀둔, 아미 루샤 브라운 |
직업 | 회계사 |
군사 경력 | |
소속 | 뉴질랜드 |
복무 기간 | 1940년–1946년 |
계급 | 병장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솔로몬 제도 전역 이탈리아 전역 |
부대 | 제37대대, 사단 기병 연대 |
정치 경력 | |
국회의원 (MP) | 타마키 |
의회 | 뉴질랜드 |
임기 시작 | 1960년 11월 26일 |
임기 종료 | 1991년 12월 31일 |
이전 의원 | 밥 티저드 |
다음 의원 | 클렘 시미치 |
수상 경력 | |
수상 순서 | 31대 |
직책 | 뉴질랜드 총리 |
임기 시작 | 1975년 12월 12일 |
임기 종료 | 1984년 7월 26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데니스 블런델, 키스 홀리오크, 데이비드 비티 |
부총리 | 브라이언 탤보이스(1975–1981), 덩컨 매킨타이어(1981–1984), 짐 맥레이(1984) |
이전 수상 | 빌 롤링 |
다음 수상 | 데이비드 랭이 |
재무 장관 경력 | |
재무 장관 순서 | 32대 |
직책 | 재무 장관 |
임기 시작 | 1975년 12월 12일 |
임기 종료 | 1984년 7월 26일 |
수상 | 본인 |
이전 장관 | 밥 티저드 |
다음 장관 | 로저 더글러스 |
재무 장관 순서 (두 번째) | 31대 |
임기 시작 (두 번째) | 1967년 3월 4일 |
임기 종료 (두 번째) | 1972년 12월 8일 |
수상 (두 번째) | 키스 홀리오크, 잭 마셜 |
이전 장관 (두 번째) | 해리 레이크 |
다음 장관 (두 번째) | 빌 롤링 |
부총리 경력 | |
부총리 순서 | 4대 |
직책 | 뉴질랜드 부총리 |
임기 시작 | 1972년 2월 9일 |
임기 종료 | 1972년 12월 8일 |
수상 | 잭 마셜 |
이전 부총리 | 잭 마셜 |
다음 부총리 | 휴 와트 |
야당 대표 경력 | |
야당 대표 순서 | 21대 |
직책 | 야당 대표 |
임기 시작 | 1974년 7월 9일 |
임기 종료 | 1975년 12월 12일 |
수상 | 노먼 커크, 빌 롤링 |
부대표 | 브라이언 탤보이스 |
이전 대표 | 잭 마셜 |
다음 대표 | 빌 롤링 |
임기 시작 (두 번째) | 1984년 7월 26일 |
임기 종료 (두 번째) | 1984년 11월 29일 |
수상 (두 번째) | 데이비드 랭이 |
부대표 (두 번째) | 짐 맥레이 |
이전 대표 (두 번째) | 데이비드 랭이 |
다음 대표 (두 번째) | 짐 맥레이 |
2. 어린 시절
오클랜드에서 중하층 부모에게서 태어난 멀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헌신적인 사회주의자이자 강한 의지를 가진 외할머니 제루샤였다. 멀둔은 외할머니의 신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영향으로 강한 야망,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 뉴질랜드의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심을 키웠다.[10] 10대 시절, 멀둔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던 아버지가 매독에 감염되어 정신이 쇠약해져 정신병원에 맡겨진 것에 대한 굴욕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에서 정보관을 지낸 멀둔은 회계사로서 훈련을 완료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했을 때 그는 뉴질랜드 최초의 정식 자격을 갖춘 원가회계사였다.[18] 1947년 3월 보수적인 국민당의 청년 당파인 주니어 국민당의 새롭게 창립된 지부에 가입하였다. 그는 빠르게 당에서 활동적이 되어 키스 홀리오크 정부를 권력에 데려온 파동에 1960년 타마키를 위하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 전에 1954년과 1957년 확고한 재직자에 대한 국회를 위하여 2번의 입찰을 했다. 그는 논쟁의 재능과 자신의 평의원 작업에 대한 근면을 보였으며 1963년 재무장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보유한 동안 그는 뉴질랜드에 십진수 통화의 성공적인 도입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1967년 전임 재무장관 해리 레이크가 사망했을 때 멀둔은 그를 대체하는 데 자연적이자 단 하나의 선택이었으며 45세의 나이에 그는 1890년대 이래 최연소 재무장관이었다. 하지만 홀리오크가 멀둔이 너무 거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야망적이었던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재무장관의 일반적인 세번째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으나 정부의 정면석에 최하위 위치에 여덟번째에 놓였다.
마셜은 "남자 대 남자, 최강의 팀"이라는 슬로건으로 1972년 총선을 치렀는데, 이는 특히 자신의 부총리였던 멀둔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저조한 스타일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멀둔은 노동당의 공약에 대해 "그들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미 다 써버렸으니까요."라고 논평했다.[20][21] 카리스마 넘치는 노먼 커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하여, 12년 동안 지속된 국민당의 권력이 종식되었다.
총리가 되었을 때 멀둔은 전통을 깨고 재무장관으로 남아있던 것은 물론 자신에 막대한 권력을 집중하였다. "멀둔의 세월"은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뉴질랜드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국가를 유지하는 데 멀둔의 완고하고 자력이 있고 독재적인 시도들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국가의 경제는 1973년 에너지 위기의 여파,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에 뉴질랜드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의 손실과 맹렬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경제의 다양화를 촉진시키는 데 시도하는 것보다 멀둔은 가혹한 임금과 가격 통제를 부과하였고 최소한의 이익을 실패 또는 양보하고 많은 것들이 노사분규로 막혔던 큰 규모의 산업 프로젝트로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빌려 조달했던 것이 자신이 "크게 생각"으로 표시했던 전략을 흥행하였다. 그는 또한 복지 국가와 뉴질랜드의 농업 보조금의 극도로 호화로운 제도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빚을 졌다.
1992년 8월 5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오클랜드 메도뱅크의 퓨어와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소는 오클랜드 중심업무지구를 향하고 있다.[69] 그의 아내 데임 테아 멀둔은 2015년 2월 24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0]
[1]
웹사이트
Obituary: Sir Robert Muldoon
https://www.independ[...]
2021-07-24
로버트 데이비드 멀둔은 1921년 9월 25일 오클랜드에서 제임스 헨리 멀둔과 에이미 러샤 멀둔 사이에서 태어났다.[10]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인 멀둔 가문(아일랜드어: Ó Maoldúin)은 아일랜드인 출신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리버풀에서 이민 온 아일랜드 태생이었다.[11][12][13]
5살 때 멀둔은 정문에서 놀다가 미끄러져 뺨을 다쳐 평생 남는 특징적인 비대칭적인 미소를 갖게 되었다.
8살 때 그의 아버지는 파렌키마성 매독으로 오클랜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10] 거기서 1946년, 거의 20년 후에 사망했다.[5] 이로 인해 멀둔의 어머니는 홀로 그를 키우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멀둔은 강인하고 지능적이며 의지가 강한 외할머니 제루샤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멀둔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장학금을 받고 마운트 알버트 문법학교(Mount Albert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플레처 건설(Fletcher Construction)과 오클랜드 전력위원회(Auckland Electric Power Board)에서 미납금 담당 사원으로 일했다. 그는 통신 과정을 통해 회계학을 공부했다.
1951년 멀둔은 테아 데일 플라이거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세 자녀를 두었다.[14]
3. 초기 경력
멀둔은 낙태와 사형이 둘다 잘못되었다고 믿었으며, 인간의 삶의 신성을 믿었다. 그는 사형제 폐지를 위하여 야당과 함께 투표하기 위하여 바닥을 넘었다.
국회 의원으로서 자신의 초기 세월부터 멀둔은 자신의 지지자였던 자들 중에 마저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자신과 함께 남아있는 "돼지"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멀둔은 급속히 국가적 프로필을 설립하였고 많은 역사가들은 1969년 총선에서 국민당의 놀라운 승리를 위하여 홀리오크 총리 혹은 그의 대리인 잭 마셜의 이미지보다 그의 이미지를 신용하였다. 그는 그의 이전 상사가 부족한 새로운 텔레비전 매체를 위해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는 아직도 뉴질랜드의 여론 조작의 가장 교묘한 수행자들 중의 하나로 숙고되었다.) 홀리오크가 1971년에 물러났을 때 멀둔은 최고의 직업을 위하여 마셜을 도전하였고 그는 간신히 패하였으나 만장일치로 부지도자로 선출되어 따라서 부총리가 되었다.
멀둔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11월 뉴질랜드 군에 입대하여 제37대대 소속으로 남태평양에서 복무했다.[18] 이후 이탈리아로 파병되어 같은 부대(뉴질랜드 사단 기갑연대)에서 복무했는데, 훗날 국민당 동료가 된 던컨 매킨타이어와 잭 마셜도 같은 부대에 있었다. 멀둔은 이탈리아에서 잭 마셜의 텐트에서 회계사 자격 시험 최종 시험을 치르며 회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영국에서 1년간 공인회계법인에 근무했다. 멀둔의 1977년 자서전 ''Muldoon''에 따르면 그는 전쟁 후 뉴질랜드 최초의 정식 자격을 갖춘 원가회계사로 귀국했지만, 이를 확인하는 다른 자료는 없다.
4. 야당 지도자
당시 많은 당 의원들은 마셜이 새로 취임한 강력한 노먼 커크 총리에 맞설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마셜은 사임했고, 멀둔이 그 뒤를 이어 1974년 7월 9일 야당 대표가 되었다.[10] 다음 날, 멀둔의 첫 자서전인 "젊은 터크의 부상과 몰락(The Rise and Fall of a Young Turk)"이 출판되었다.[10] 이 책은 네 번이나 재판되면서 2만 8천 부가 팔렸다.[10] 멀둔은 텔레비전을 능숙하게 활용했고, "롭의 무리(Rob's Mob)"라고 불리는 충성스러운 지지자들로 가득 찬 대중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 중에는 많은 블루칼라 보수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2]
멀둔은 커크와 맞붙을 기회를 반겼지만, 1974년 8월 31일 커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그 기회는 짧았다. 커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빌 롤링이 총리로 교체되었다. 1975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국민당은 멀둔이 직접 고안한 "당신이 원하는 방식의 뉴질랜드(New Zealand – The Way You Want I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커크와 로울링의 고용주 부담 연금 제도를 대체할 풍족한 국민연금 제도를 약속하고, 뉴질랜드의 "파탄 난 경제"를 회복하겠다고 공약했다. 노동당은 멀둔이 "가장 얇게 위장한"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묘사한 "로울링을 위한 시민들(Citizens for Rowling)"이라는 캠페인으로 맞섰다. 멀둔은 로울링을 압도하여 노동당의 32석 대 55석 다수당을 국민당의 55석 대 32석 다수당으로 역전시켰다.
5. 총리 재임
멀둔은 1978년과 1981년에 재선되었지만 양선거에서 노동당 상대는 전체로서 전국에 걸쳐 더욱 많은 대중 투표들을 받았다. 이 모호한 권한은 멀둔의 의제를 희석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집권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더욱 단호하고 독재적이 되었다.
1970년대의 석유 위기가 일어난 동안 외환의 이용에 관하여 걱정이 된 멀둔은 차량이 천연가스 혹은 이중 연료의 가스-휘발유 시스템에 의하여 전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계획을 지원하였다. 전환을 장려하는 데 장려금이 멀둔의 1979년 예산에 소개도었고 뉴질랜드는 흔한 광경으로 이중 연료 자동차들을 가지는 데 가능하게 첫 국가로서 나타났다. 하지만 석유 가격이 더욱 높아질 예상은 이 기간 동안 더욱 높아질 것이었다.
1980년 멀둔을 그의 대리인 브라이언 털보이스와 대체하는 데 대령의 쿠데타로 알려진 실패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털보이스는 다소 꺼리는 징집병이었고 멀둔은 상대적으로 쉽게 음모자들을 배웅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총리로서 그의 세월에 멀둔의 권한에 단 하나의 심각한 도전이었다.
멀둔의 권위주의적 명성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 스프링복스에 의한 1981년 투어 방지를 거부함으로서 더욱 악화되었다. 알려지면서 "투어"는 뉴질랜드가 여태까지 본 대규모 시위들과 최악의 사회적 분열을 일으켰다. 멀둔은 투어 찬성 측에 단호하게 서서 스포츠와 정치는 따로 보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위대들을 위하여 노골적으로 경멸하였다. 그는 스프링복스를 추방하는 것에 자신의 거절은 반권위주의였다는 것을 주장하여 아파르트헤이트의 대표들과 스포츠를 하는 데 여부를 개인의 양심에 맡겼다. 그는 또한 그들의 럭비팀을 투어에 허용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의미한 소련의 팀이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43][44]
그는 1983년 1월 1일에 시행된 무역을 자유화하는 데 오스트레일리아와 긴밀 경제 관계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양국간 총 자유 무역의 목표는 스케줄의 5년 앞서 1990년에 성취되었다.[52] 멀둔 행정부는 또한 1984년 초순에 뉴질랜드로 문자 다중 방송을 소개하기도 하여 국가를 정보화 시대로 데려왔다.
그는 1983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1등급을 받아 직무에 있던 동안 기사 작위를 받는 데 단 하나의 뉴질랜드 총리였다. 그는 이후에 영국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의 독재적인 스타일은 결국적으로 그를 취소하였고 1984년 7월 14일 조기 선거에서 그는 데이비드 롱이의 노동당에게 패하였다.
멀둔은 1975년 12월 12일, 54세의 나이로 뉴질랜드의 31대 총리로 취임했다. 대중주의자[23]였던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정부"를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정부는 즉시 경제 문제에 직면했는데, 1976년 6월부터 1978년 3월까지의 경기침체로 뉴질랜드 경제는 4.1% 감소하고 실업률은 125% 증가했다.[24]
멀둔의 첫 조치 중 하나는 새로운 법률 없이 노동당의 연금 제도를 폐지하도록 뉴질랜드 총독에게 권고하겠다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발표한 것이었다. 멀둔은 해산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나중에 의회에 법안을 제출하여 폐지를 소급 적용하여 합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피츠제럴드 대 멀둔 및 기타'' 사건에서 권리장전 1689년이 적용되었다.[25] 리처드 와일드 경 대법원장은 멀둔의 행위가 "법률을 집행하는 왕권은 불법이다"라고 규정한 권리장전 제1조를 위반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선언했다.[26] 궁극적으로 멀둔은 행정부 구성원으로서 규정된 권한을 넘어 행동했는데, 법률을 제정하고 폐지할 권한은 의회에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멀둔의 행위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법치주의와 의회의 주권을 침해했기 때문에 위헌이었다.[27] 이는 리처드 와일드 경의 판결에 요약되어 있는데, 그는 "발효 중인 의회법은 그러한 공제와 기여가 이루어져야 함을 요구했지만, 여기 총리가 그것이 필요 없다고 발표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을 정지하려고 했다고 판단해야 한다. 의회가 법을 만들었다. 따라서 법은 의회 또는 의회의 권한으로만 개정 또는 정지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28]
경제 전문 기자 브라이언 게이너는 멀둔의 노동당의 저축 제도 역전 정책이 뉴질랜드 경제를 변화시킬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주장했다.[29] 국민연금 제도는 멀둔의 1975년 선거 공약 중 하나였는데, "관대한" 정책으로 묘사되었고, 고령 유권자들의 지지를 재편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높은 비용은 예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가렛 맥클루어는 이 제도의 연금이 세계 다른 지역의 유사한 정책보다 상당히 높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기혼 부부 연금은 평균 임금의 49%, 호주는 40%, 영국은 38%였지만 뉴질랜드는 80%였다. 따라서 1981년까지 이 제도에 대한 지출은 두 배가 되었고, 정부 예산의 17.3%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이 기간 동안 다른 사회 정책 프로그램, 특히 교육이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스티븐 코스 판사도 "기여 없이 증가한 것은 전적으로 지속 불가능했다"고 말했다.[30]
멀둔 정부는 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상속받았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뉴질랜드 경제는 여러 국제적 상황들로 인해 심각하게 침체되었다. 1966년 국제 양모 가격 하락, 1973년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뉴질랜드의 가장 중요한 수출 시장을 빼앗김), 그리고 1973년 석유 위기 등이 그러한 요인이었다. "멀둔 시대"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1935년부터 이어져 온 뉴질랜드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국가를 유지하려는 멀둔의 완고하고도 기발한 시도를 특징으로 한다. 멀둔은 당 대표가 된 후에도 국가당의 재정 대변인직을 유지했고, 결과적으로 1975년 국가당이 집권하면서 재무장관이 되었으며, 이로써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이 두 직책을 모두 역임한 마지막 인물이다.
첫 번째 임기(1975~1978) 동안 멀둔은 지출 감소에 집중했지만, 자신이 도입한 고액 연금 제도의 증가하는 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많은 세금 감면 및 면제 조치 때문이었다. 1978년 3월까지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지만,[24]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24]
로버트 멀둔은 노동당 전임 총리 노먼 커크의 정책을 계승하여 1974년부터 시작된 불법 체류자 태평양 도서국민 체포 및 추방 정책을 계속 시행했다. 1950년대 이후 뉴질랜드 정부는 전후 경제 호황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사모아, 통가, 피지 등 여러 태평양 국가에서 상당한 이민을 장려해왔다. 그 결과 1971년까지 뉴질랜드의 태평양 도서국민 인구는 45,413명으로 증가했고, 상당수가 비자 체류 기간을 초과했다. 1970년대 초의 경제 위기는 범죄, 실업 및 기타 사회 문제를 증가시켰고, 이는 태평양 도서국민 사회에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74년 7월, 야당 대표였던 멀둔은 이민을 줄이고 법과 질서 문제에 대해 "강경 대응"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의 이민 정책이 경기 침체에 기여했고 주택 부족을 야기하여 "뉴질랜드식 삶"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1975년 총선에서 국가당은 폴리네시아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종 감정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은 논란이 많은 선거 광고를 내보냈다.[31] 멀둔 정부는 커크 정부의 태평양계 불법 체류자에 대한 경찰 단속을 가속화하고 확대했다. 이러한 작전에는 뉴질랜드 전역의 불법 체류자 주택에 대한 새벽 강제 추방을 실시하는 특별 경찰대가 포함되었다. 불법 체류자와 그 가족들은 대개 원산국으로 추방되었다.[32]
새벽 강제 추방은 태평양 도서국민과 마오리족 공동체, 교회 단체, 고용주와 노동 조합, 반인종차별 단체, 그리고 야당인 노동당을 포함한 뉴질랜드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광범위하게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강제 추방은 태평양 도서국민 사회와의 관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뉴질랜드 경찰과 여당인 국가당의 일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당시 태평양 도서국민은 불법 체류자 중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대부분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 출신), 불법 체류로 체포되고 기소된 사람의 86%를 차지했다.[32] 멀둔 정부의 불법 체류자 처리 방식은 사모아와 통가와 같은 태평양 국가와의 관계를 손상시켰고, 남태평양포럼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멀둔 정부는 경제 문제를 완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벽 강제 추방을 중단했다.[32]
1976년 11월, 멀둔은 의회에서 야당 의원이자 전 내각 장관인 콜린 모일이 1년 전 동성애 활동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비난했다.[33]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남성 간의 동성애 활동이 불법이었다. 모일은 여러 차례 진술을 바꾼 후 의회에서 사퇴했다. 그는 나중에 사퇴할 의무는 없었지만, "전체 사건이 너무 끔찍해서" 사퇴했다고 말했다.[34] 멀둔이 모일을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0년 인터뷰에서 모일은 이 사건으로 인해 "더 슬프고 현명해졌다"고 말했다.[34] 총리실 장관인 제럴드 헨즐리는 멀둔이 나중에 모일의 동성애 사실을 공개한 것이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적었다.[35]
이어진 보궐선거는 데이비드 랭이 승리했고, 이로 인해 랭은 노동당 지도부로 올라섰으며, 1984년 총선에서 멀둔을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로 이끌었다.
총리로서 멀둔은 총독 임명에 관해 엘리자베스 2세에게 조언할 단독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데니스 블런델 경의 총독 임기가 1977년에 끝나면서 새로운 임명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멀둔은 1976년 12월 15일 여왕에게 전 총리 서 키스 홀리오크 경을 자신의 임명자로 추천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여왕은 이를 승인했다. 이 발표는 여왕이 1977년 3월 7일 뉴질랜드 순방을 마치고 왕실 요트 ''브리타니아''호에서 리틀턴 항에서 발표했다.
이 선택은 홀리오크가 현직 내각 장관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멀둔 정부의 반대자와 지지자 모두 이것이 정치적 임명이라고 주장했으며, 부총리 등 여러 국민당 국회의원들은 정치인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선례에 동의하지 않았다. 야당 대표 빌 로울링은 자신이 임명에 대해 상의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며, 노동당이 1978년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홀리오크를 총독직에서 해임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임명으로 인해 홀리오크는 의회를 사임했고, 이로 인해 1977년 파히아투아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그의 의석은 존 팰런이 계승했다.
총선 한 달 전, 멀둔은 여전히 지지율이 높은 총리였지만, 지지율은 60%에서 48%로 하락한 반면, 로울링의 지지율은 8%포인트 상승하여 38%에 달했습니다. 11월 25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당은 3석을 잃었고 득표율은 7.9%포인트 하락했습니다. 비록 국민당이 의석 과반수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부활한 노동당에 인기투표에서 패했습니다. 국민당 대표 조지 채프먼은 국민당이 선거에서 고전한 이유는 여러 선거구 변경과 유권자 명부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멀둔이 언론의 국민당 반대 여론이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상반됩니다.
멀둔은 처음에는 간접 소비세가 저소득층에게 불이익을 주고, 임금 인상에 따른 물가 상승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1979년 5월, 그는 휘발유, 잔디깎이, 카라반, 보트 등 광범위한 상품에 10%~20%의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를 증대하려 했다.[36] 이러한 세금은 차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세제 개혁(간접세 전환을 반영한 소득세 감면은 없었다)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궁여지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트와 카라반에 대한 세금은 건설 비용에 20%의 세금이 추가되면서 구매력이 떨어져 해당 산업을 침체시켰고, 노동자들이 해고되면서 추가적인 실업을 초래했다.[37]
냉전 시기 다른 보수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멀둔은 반소적 입장을 취했다. 오랜 국민당 활동가였던 멀둔은 공산주의를 "이질적인" 집산주의 철학으로 배격했다.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프로그램 ''갤러리''에서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한 좌파 성향의 성직자들을 소련 공산주의에 반대하지 않은 점을 비난하기도 했다. 멀둔은 뉴질랜드 노동 조합 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뉴질랜드 공산당에서 분리된 세력인 모스크바 추종 사회주의 통일당을 뉴질랜드와 남태평양 도서 국가들을 전복하려는 소련의 제5열로 간주했다. 여러 연설과 보도 자료에서 그는 사회주의 통일당과 다른 공산주의 단체들이 파업을 선동하고 미국 해군 방문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뉴질랜드 스포츠 교류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다고 비난했다.
총리 재임 중 그는 미국과 중국 모두의 견해, 즉 소련이 남태평양에서 패권적 야망을 가진 공격적인 세력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멀둔은 또한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규탄하고 1980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다른 서방 지도자들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뉴질랜드의 주로 농업에 기반한 수출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하는 소련에 대한 무역 보이콧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80년 국민당 정부는 사회주의 통일당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대사 Vsevolod Sofinski를 추방하기도 했다. 소련과 국내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멀둔 정부는 소련과 여전히 경제 관계를 유지했다.
데이비드 얄롭이 멀둔의 관심을 농부 부부인 하비와 장네트 크루 살인 사건으로 두 번 유죄 판결을 받은 아서 앨런 토마스 사건으로 돌린 후, 멀둔은 뉴질랜드의 킹스 앤드 퀸스 컨설 명단에 있는 로버트 애덤스-스미스에게 사건을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애덤스-스미스는 '불공정이 있었을 수 있다'고 보고했고, 멀둔은 토마스에 대한 특사를 밀어붙였다.[38] 그 후의 왕립 조사 위원회는 토마스를 무죄로 판결하고 그가 복역한 기간에 대한 보상으로 95만뉴질랜드 달러를 지급할 것을 권고했다.[39]
멀둔이 프랭크 길을 미국 주재 뉴질랜드 대사로 임명하면서 길의 지역구인 이스트 코스트 베이즈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멀둔이 지지한 후보는 당시 국가당 부위원장이었고 이후 당 위원장이 된 수 우드였다. 국가당은 미래의 뉴질랜드 준비은행 총재이자 이후 국가당 대표가 된 경제 자유주의자 돈 브래시를 후보로 선택했다. 브래시는 사회신용당의 게리 냅에게 보궐선거에서 패했는데, 이는 큰 충격이었고 멀둔의 지도력에 타격을 입혔다. 멀둔은 이 패배에 대해 브래시와 당 조직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입장 때문에 당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보궐선거 패배는 국가당 내에서 멀둔의 지도력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부 해안 만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후, 멀둔은 1980년 10월~11월에 그를 당수직에서 축출하려는 미수에 직면했다. 짐 볼거, 짐 맥레이, 데릭 퀴글리가 배후에 있었던 이 사건은 '대령들의 쿠데타'로 알려져 있으며, 멀둔을 경제적으로 더 자유주의적인 그의 부총리 브라이언 탈보이스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해외에 있었던 멀둔은, 특히 탈보이스 자신이 주저하는 후보였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이 음모를 저지했다. 1984년 선거 이후까지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지도력에 대한 다른 심각한 도전은 없었다.
로버트 멀둔은 정치가 스포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 럭비 유니온 대표팀인 스프링복스의 1981년 투어를 금지하려는 압력에 저항했습니다. 멀둔은 "투어"를 허용함으로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보이콧 이후 영연방 국가들 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스포츠 교류에 대한 공동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체결된 1977년 글린이글스 협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멀둔은 글린이글스 협정이 수정되었으며, ''타임스''지 기사에서 "뉴질랜드와 그 후 다른 국가들은 자국 선수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스포츠 접촉을 금지하는 협정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이유로 글린이글스 협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42] 이른바 "투어"는 대규모 공개 시위와 뉴질랜드가 경험한 최악의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멀둔은 투어 찬성 측에 단호하게 서서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스프링복스를 금지하지 않은 것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며, 아파르트헤이트 대표와 스포츠를 할 것인지 여부는 개인 양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럭비팀의 투어를 허용하는 것이 소련 팀과 경기를 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43][44]
이란 혁명으로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뉴질랜드의 경제 성장은 1976~78년 경기 침체에서 겨우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 석유 파동이 닥쳤다.[24] 경제적 압박은 계속 증가했고, 멀둔은 임금과 인플레이션의 급증을 노동 조합 지도부와의 타협을 통해 통제하려 했다. 즉, 세율 인하 대신 임금 인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합의였다. 이는 1983년 호주에서 이루어진 협정과 유사하다. 멀둔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뉴질랜드 노동 연맹의 회장 짐 녹스는 협력을 거부했다.[45] 이에 따라 멀둔은 정부가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주로 에너지 관련)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큰 생각(Think Big) 전략을 도입했다.[10]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뉴질랜드의 에너지 자급률을 60% 이상으로 높이고 42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었다.[46] 수출용 알루미늄 제조에 사용되는 전기를 생산하는 클라이드 댐은 뉴질랜드를 세계의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멀둔의 노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46] 이 댐은 "요새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46]
큰 생각 프로젝트는 멀둔의 유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멀둔은 이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제시하면서 그 이점을 과장했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예상 비용의 최대 10배에 달하는 심각한 예산 초과가 발생했다. 사용된 모든 장비와 기술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이는 곧 국제수지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 원유 가격 상승, 뉴질랜드 교역 조건 악화, 큰 생각 프로젝트의 예상치 못한 수익 감소로 인해 멀둔은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47] 1975년 선거에서 멀둔이 부채를 없애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높은 수준의 부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47] 큰 생각 프로젝트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1970년대 석유 위기 당시 외환 사용에 대한 우려로 멀둔은 자동차를 천연가스 또는 이중 연료 가스-휘발유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개조하는 계획을 지원했다. 1979년 예산에서는 개조에 대한 인센티브가 도입되었고, 뉴질랜드는 이중 연료 자동차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되었던 원유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프링복 투어에 대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멀둔 정부는 11월 28일에 치러진 1981년 총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개표 당일, 국민당은 46석, 노동당은 44석, 사회신용당은 2석을 얻었지만, 재검표 결과 국민당이 기즈번 선거구를 150표 차이로 가져가면서 1석의 과반수를 확보했습니다. 멀둔은 스프링복 투어를 선거 문제로 삼지 않도록 설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당의 선거 운동은 대신 "Think Big"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다시 한번 멀둔 정부는 야당인 노동당보다 적은 표를 얻었습니다.[10]
멀둔의 세 번째 임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단 한석의 과반수로 그는 국가당이 더욱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기를 원하는 점점 더 불안해하는 후방 의원들을 상대해야 했다. 1982년 초, 1980년 대령 쿠데타에서의 역할로 강등되었던 젊은 장관 데릭 퀴글리가 싱크 빅(Think Big)에 반대하며 그 이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결과, 멀둔은 그에게 사과하거나 내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했고, 퀴글리는 사퇴를 선택했다. 멀둔은 또한 전 지지자이자 백만장자 사업가 밥 존스와 불화를 겪었는데, 그는 멀둔의 경제 정책에 항의하며 자신만의 정당을 만들겠다는 위협을 실행에 옮겼다.
6. 사망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54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1대 뉴질랜드 국민당 35.72% 5,215표 2위 낙선 1957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2대 뉴질랜드 국민당 40.15% 6,580표 2위 낙선 1960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3대 뉴질랜드 국민당 53.58% 8,728표 1위 1963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4대 뉴질랜드 국민당 59.10% 9,645표 1위 1966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5대 뉴질랜드 국민당 55.37% 9,248표 1위 1969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6대 뉴질랜드 국민당 65.14% 11,513표 1위 1972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7대 뉴질랜드 국민당 57.77% 10,146표 1위 1975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8대 뉴질랜드 국민당 62.38% 11,836표 1위 1978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39대 뉴질랜드 국민당 56.69% 11,814표 1위 1981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40대 뉴질랜드 국민당 53.51% 11,543표 1위 1984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41대 뉴질랜드 국민당 46.35% 10,414표 1위 1987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42대 뉴질랜드 국민당 52.03% 10,466표 1위 1990년 선거 하원의원 (타마키 선거구) 43대 뉴질랜드 국민당 58.93% 12,191표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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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doon's Corner work set to begin 31 August
http://www.times-age[...]
[84]
웹사이트
Conquering the road that scared me
http://moonovermarti[...]
[85]
웹사이트
Muldoon's Corner realignment work begins
http://www.transport[...]
[86]
뉴스
Muldoon's $16m corner opens after three years
http://www.stuff.co.[...]
2013-02-10
[87]
웹사이트
Piha Surf Life Saving Club – Guardians of the Iron Sands
http://www.piha.co.n[...]
201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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